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마데오 1세 (문단 편집) === 스페인 국왕 === 1868년, [[스페인 국왕]] [[이사벨 2세]]가 물러난 이후 당시 스페인의 정권을 잡은 것은 급진 [[자유주의]] 정치가들이었다. 이들 급진 자유주의자들은 전국에 혁명위원회를 결성하고 주권재민, [[보통선거]], [[노조]] 허용과 같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던 정치이념들을 현실로 구현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혁명위원회에는 급진 자유주의자뿐만이 아니라 통합주의자, 민족주의자들까지도 상당수가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스페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이 빚어진다. 일부 정파는 공화정을 요구하는가 하면, 다른 정파는 새로운 군주를 추대하여 군주정을 지속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정국의 주도권은 [[프란시스코 세라노]] 장군에게 넘어간다. 임시정부를 수립한 세라노 장군은 선거를 실시하여 제헌의회를 선출했고, 무수한 토론 끝에 주권재민, [[입헌군주제]],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을 명시한 [[헌법]]이 통과되었다.[* 세라노 장군은 사적으로는 열렬한 공화주의자였지만, 제헌의회에서 여러 이해집단들이 토론을 거친 끝에 군주제를 유지할 것을 결정했다. 공화주의자들 역시도 몇몇 급진세력을 제외하면 '헌법만 준수한다면 아무래도 좋다'라는 심정으로 입헌군주제를 승인했다고 한다.] 이후 세라노 장군은 [[후안 프림]]에게 정부 수반직을 물려주었고, 새로 수상이 된 프림에게 주어진 선결과제는 바로 새로운 군주를 물색하는 것이었다.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고, 영국 측은 [[빅토리아 여왕]]의 시가(媤家)였던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을 은근슬쩍 밀어주기도 했다. 또한 [[프로이센 왕국]]의 [[호엔촐레른 왕조]]가 물망에 오르기도 했고[* 호엔촐레른 왕조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에 발끈해서 [[나폴레옹 3세]]가 [[빌헬름 1세]]에게 항의했던 것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이어지는 [[엠스 전보 사건]]이었다.] 카를로스파는 또 자기 나름대로 이때다 싶어서 열심히 로비활동을 벌였다. 이사벨 2세의 제부인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을 지지하는 파벌도 있었다. 1년에 걸친 옥석고르기 끝에 프림은 사보이아 왕조의 아메데오를 왕으로 임명하면서 스페인 국왕 아마데오 1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따지고보면 [[카를로스 3세]]의 여계후손이기 때문에 스페인 [[보르본 왕조]]와 아예 혈연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전 왕인 이사벨 2세와는 7촌(어머니 아델하이트 쪽으로, [[레오폴트 2세]] 경유), 또는 8촌(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쪽으로, [[레오폴트 2세]] 또는 [[양시칠리아 왕국|양시칠리아]]의 [[페르디난도 1세]] 경유)관계다. 물론 계승 서열이 더 앞서는 사람들이 더 있기에 혈연에 의해 지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보르본 왕조와 약간이나마 관련이 있으면서 국내외 여러 정파와 이해관계가 적게 겹치는 인물이라 선택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가 [[마드리드]]에 도착하기도 전에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으로 그를 모셔왔던 사람인 프림이 암살당했다. 강력한 후원자가 없어지자 카를리스타, [[알폰소 12세|알폰소 왕자]] 지지파, 민주 공화파가 반대의사를 내고 노동자들도 반대하게 되자 결국 2년만에 퇴위하고 이탈리아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퇴위로 스페인은 [[스페인 제1공화국|공화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이후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 왕자가 [[알폰소 12세]]로 즉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